
25/09/10
완독
디스토피아 소설은 꽤 많이 봤지만 완전 처음 보는 세계관이었다. 닿기만 해도 발진이 올라오고 호흡기에 문제를 일으키고 녹지도 않아서 태워야만 없어지는 '방부제 눈'이 세상을 뒤덮은 제목 그대로 스노볼 같은 세상인데 평소에 스노볼을 볼 때마다 예쁘긴 한데.. 너무 박제된 느낌이다 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느낌 그대로의 소설이라 더 맘에 들었다. 그리고 멈춰있는 그 정적인 세상 속에서 박제되지 않고 달려가는 주인공들이 보기 좋았음.
적당히 가난하고 평범한 집에서 자란 모루와 학교 이사장의 딸이자 아웃사이더인 이월이는 같은 중학교에 다닌다는 것 말고는 서로 접점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'방부제 눈'의 발생으로 패닉에 빠진 학생들 사이에서 넘어진 모루를 이월이가 도와준 이후 서로를 의식하게 된다. 거창하게 의식했다고 내가 표현하긴 했는데 그냥 둘이 서로 신경 쓰이는 애 정도의 느낌? 학교 다닐 때 하나도 안 친해도 괜히 신경 쓰이고 졸업 후에도 가끔 생각나는, 모루와 이월이는 서로에게 그런 기억일 것 같다.
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발생한 방부제 눈으로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고 엄마는 방부제 눈 소각장에서 일하다 산재로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그 와중에 트럭으로 배송일로 돈을 벌던 이모도 시력을 잃기 시작해서 실직 위기고.. 모루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자기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을 거라 이모가 결사 반대했어도 결국 소각장에 취업한 게 이해 감. 자기 마음도 모르고 계속 반대하던 이모가 야속하기도 했을 거고.. 그래서 괜히 피하고 외면하던 상태에 덜컥 이모마저 실종되었다? 나라도 죄책감 때문에 뭐라도 할 수밖에 없을 듯
반면 부유한 환경이지만 무관심한 아버지대신 강아지를 유일한 친구로 여기며 자라던 이월이는 자기 실수로 죽은 강아지의 환시를 보는 아이다. 이월이와 모루가 다니던 학교의 이사장이던 새엄마는 강아지를 잃고 슬퍼하는 이월이를 위해 강아지를 박제하는 좀 이상한 면이 있지만 이월이의 환시에 장단 맞춰주는 유일한 사람이다. 그런 새엄마기에 자기가 죽으면 방부제 눈에 묻어 썩지 않게 해 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이월이는 꼭 들어주고 싶었을 것 같다. 이월이가 새엄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부른 트럭배달부가 하필 은퇴 직전 마지막 배달을 하려던 모루 이모였고 결국 그 배달건으로 모루 이모가 실종되게 된다. 평생 우물쭈물 조용히 살던 이월이 입장에선 처음 본인 의지로 아버지에게 반항해서 큰 일탈을 한 일 때문에 유일하게 좋은 추억으로 남은 친구의 이모가 실종되었다는 사건 자체가 너무 벅차고 괴로웠을 것 같음.
녹지도 썩지도 않는 눈에 뒤덮인 세상에서 조용히 살던 그 둘이 소각장을 뛰쳐나와 실종된 이모를 직접 찾기 위해 차를 타고 떠나는 마지막이 뭔가 좋았다. 가만히 기다리는 대신 직접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면이 모루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고, 재난으로 인해 멈춰버린 세상에서 박제된 듯 살던 인물들이 자기 의지로 뛰쳐나가는 게 좀 멋있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..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결국 둘이 이모를 찾게 되면 좋겠다고 응원하게 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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